난 아무도 믿지를 못해. 믿기가 힘들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아닌 누구를 믿는다는 건 불가능해.
누군가 잘해주면 겉으로는 고마워하면서도 속으로는
‘이게 얼마나 가겠어.’
‘조금만 어긋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건데 뭐’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항상 금방 발을 뺄 수 있을 만큼만 한 쪽 다리, 그 다리도 반만 살짝 걸치고 있어. 그러다 보니 당연히 깊은 관계를 가질 수가 없지. 친구도, 연인도 마찬가지야.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180도 달라진 친척들과 아버지 친구들의 무관심,
아버지가 없는 어머니를 만만히 보고 빌린 돈을 안 갚으려고 했던 고모부,
삼촌이 둘이나 있는데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자 오죽하면 아직 고등학생이였던 나에게 도와 달라고 하소연을 했겠는가.
그래서 잠시 존경까지 했던 그 고모부와 쌍욕을 하며 싸웠어.
그런 쓰라린 기억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럼 혹시 내가 기억을 못하는 어린 시절에 경험이 트라우마처럼 지금까지 전해지는 걸까?
그러다 우연히 루마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됐어. 독재자 차우세스쿠 정권이 무너진 뒤 루마니아 보육원의 현실은 참혹했다고 해. 부족한 음식과 열악한 위생, 개별적인 관심조차 받기 어려운 환경. 아이들은 수유나 기저귀 교체 시간 외에는 침대에 누워 지냈고, 달래주거나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 연구자 네이선 폭스는 울어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경험 때문에 아이들이 울음을 줄였을 수 있다고 설명했어. 그렇게 아이들은 방치된 채 많은 시간을 보냈지. 그 뒤 일부 아기들은 해외에 입양이 되었고, 그 아이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추적해봤더니, 그들은 주의력과 사회적, 정서적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어. 아무런 기억도 없는 그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거지.
아기에게 어른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실험이 있었어. 엄마가 아기와 마주 보고 놀아. 아기가 웃으면 엄마도 웃어줘. 손짓하면 반응해주고. 그러다 엄마가 갑자기 표정을 지우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거야. 그냥 눈앞에 그대로 앉아 있어. 아기는 다시 웃어보고 손을 뻗어. 엄마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점점 괴로워하고 울기 시작해. 에드워드 트로닉의 ‘무표정 실험’이야. 잠깐의 실험이 평생의 트라우마를 만든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아기에게 어른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눈으로 보게 해줘. UMass Boston
무서울 때 누군가 안아주고, 울면 와서 살펴보고, 자기가 낸 소리에 얼굴을 마주 보며 대답해주는 일. 하버드 아동발달센터는 이런 주고받는 반응이 뇌 발달을 돕고, 지지해주는 어른과의 관계가 스트레스 반응을 완충한다고 설명해. developingchild.harvard.edu
안아준다는 건 아이를 조용하게 만드는 방법 그 이상인 거지. 아이가 원하고 편안해하는 방식으로 곁에 있어주면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을 함께 지나가 주는 일이니까. 생각해보면 어른인 우리도 그렇잖아. 너무 놀라서 손이 떨릴 때, 옆에서 누가 차분하게 이야기해주면 조금씩 진정돼. 슬픈 일을 겪었을 때 해결책은 없어도,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겨우 견디기도 하고.
내가 울거나 손을 뻗어 누군가를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거나, 안아주지도 않았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니 나도 모르게 위로를 구하는 표현을 줄였던 거 아닐까? 어떤 때는 다정하다 갑자기 차갑게 돌아서는 이런 예측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반응 때문에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어진 건 아닐까?
어린 시절의 일이 불치병은 아닐거야. 루마니아 아이들을 위탁가정으로 옮겨 돌본 연구에서는 증상이 개선되었고, 그 차이는 청소년기를 지나서도 이어졌어. 미국에서는 돌보는 어른이 아이의 신호에 더 다정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도왔을 때, 아이들의 스트레스 호르몬 조절에서도 변화가 나타났고. pubmed.ncbi.nlm.nih.gov
그러니 어린아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았으면 해. 아이가 찾아왔을 때 눈을 맞추고, 무섭다고 하면 들어주고, 원할 때 안아주는 일 말이야. 매번 완벽할 수는 없어도, 놓쳤다면 다시 다가갈 수는 있잖아.
그리고 그런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사람이라면, 지금도 힘들다는 이유로 자신까지 나무라지는 않았으면 해. 그리고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줘.
“네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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